※ Dx3rd 『RW』 공식 시나리오 캠페인 Outbreak of War 전체 스포일러
※PC1X시나로 드림 커미션
英雄回顧録
마토바 케이고가 토도로키 세이쥬로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2년 전의 어느 날이었다.
토도로키 겐쥬로가 스치듯 손자에 관한 이야기를 낸 것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었다. 그의 손자인 토도로키 세이쥬로에게도 슬슬 제대로 된 무술을 전수할까 한다는, 고작 그뿐인 내용. 그러나 토도로키 겐쥬로는 개인사나 가족사 등을 잘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고작 열다섯이었던 마토바 케이고는 유독 겐쥬로가 뱉은 몇 마디 문장이 인상 깊게 남았다.
존경하는 스승이자 은사의 손자. 부정적인 감정을 가질 이유란 어디에도 없어서, 마토바 케이고는 세이쥬로에 관해 무엇도 몰랐음에도 상대의 이름 다섯 글자를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한창 토도로키 겐쥬로에게 무술을 전승받던 시기, 마토바 케이고는 그날의 일을 금세 기억 저편에 밀어 넣어 두었고, 그리고.
처음의 만남은, 토도로키 겐쥬로의 장례식에서.
레니게이드 워의 종언은 토도로키 겐쥬로의 죽음과 함께 찾아왔다. 여즉 히어로 데뷔조차 하지 않은 열일곱의 마토바 케이고는 토도로키 겐쥬로의 영정 사진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전쟁은 죽음을 낳고 토도로키 겐쥬로는 언제나 그 일선에 서 있던 사람이었음에도, 적어도 마토바 케이고에게 토도로키 겐쥬로란 언제까지고 꺾이지 않을 것만 같던 사람이었어서인지.
마토바 케이고는 그날, 죽음이란 모두에게 공정하게 찾아온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울음과 비탄이 섞인 공기를 돌이켜 보았다. 전쟁 사이 타인의 슬픔을 마주해본 적 없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직접 누군가를 잃어 본 지금에서야 마토바 케이고는 죽음의 의미를 깨달았다. ‘누군가의 부재가 이다지도 클 수 있구나.’ 고작 그 문장이 불러일으키는 파문이란 참으로 거대해서.
그날, 마토바 케이고…… 팔라딘이라는 이름을 짊어지게 될 남성은 죽음이 싫어졌다. 모든 비극의 시발점이었다.
토도로키 겐쥬로의 장례는 비공식적으로, 그의 친인척만을 대상으로 열렸으나 장례식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토도로키 겐쥬로가 지닌 존재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으므로 그와 크고 작은 인연이 있는 모두가 각자의 감정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토도로키 겐쥬로의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며, 마토바 케이고는 어떠한 필연처럼 장례식장의 구석에 꿇어앉은 한 소년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겐쥬로의 과거를 연상시키는 낯에 케이고는 어렵지 않게 그가 토도로키 세이쥬로, 겐쥬로의 손자임을 알아보았다. 케이고는 세이쥬로에게 위로의 말 몇 마디나마 건네는 것이 좋을지를 잠시 고민하였으나, 토도로키 겐쥬로라는 연결고리가 있다곤 한들 고작 남일 뿐인 그가 그리 행동하는 것은 제멋대로의 오지랖이란 생각을 내버릴 수 없어서, 케이고는 세이쥬로와의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다만 그는 멀리서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스승님에게 무술을 전수받았다면…….’ 아직은 어려 보이지만, 현장에서 마주할 날이 머지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겐쥬로를 향한 믿음에서부터 비롯된 확신이었다. 그야, 토도로키 겐쥬로가 아무 재능도 의지도 없는 이에게 무술의 편린이나마 물려주었을 리 없으니까.
그때, 사형으로서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네야지.
지금 멋대로 다가가서 겨우 감정을 가라앉혔을지 모를 상대를 들쑤시는 것보단 언제일지 모를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마토바 케이고는 감히 믿었다. 고작 열 살은 되었을까 싶은 소년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는 이어 조용히 몸을 물렸다.
마지막까지, 시선은 토도로키 세이쥬로의 자그마한 형상을 좇는 채였다.
* * *
두 번째의 만남은 생각보다도 이르게 찾아왔다. 마토바 케이고가 바란 적 없었고 예상한 적도 없던 형태를 하곤.
그날은 히어로 마토바 케이고, 팔라딘의 데뷔일이었다. 지금에서는 일종의 전설처럼 남은 봄버 페스타와의 일전, 쇼핑몰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에서 팔라딘은 세상에 제 이름 세 글자를 분명히 각인시켰다. 팔라딘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날 팔라딘이 얼마나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었는지…… 어찌하여 그가 최강이라는 이름을 짊어지게 되었는질 모를 수 없을 정도로, 팔라딘의 데뷔는 충격적이었고 또 극적이었다.
그러나 팔라딘에게 자신의 데뷔는 조금 다른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다른 히어로들이 봄버 페스타에게 속수무책으로 휘말릴 때, 그곳에 발을 디딘 팔라딘은 쇼핑몰에 들렀다 사건에 연루되어버린 열셋의 토도로키 세이쥬로를 마주했다.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
자신의 자그마한 실수 하나에 스승의 손자가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은 처음부터 무의미했다. 팔라딘은 그 이름과 명성에 걸맞게 처음의 순간에조차 자신의 존재를 훌륭하게 증명해냈고, 거센 폭발로부터 모두를 지켜냈다. 다만 그날, 토도로키 세이쥬로가 팔라딘의 등을 바라보며 넘을 수 없는 벽을 느꼈다면.
마토바 케이고는 토도로키 세이쥬로의 시선 속에 깃든 감정을 읽어냈다. 질투와 열등감, 혹은 동경에 뒤덮인 체념을 닮은 것.
그가 직접 토도로키 세이쥬로를…… 스승님의 유지를 지켜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스쳐 지나가는 상념에 불과했다. 인사는 건넬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케이고는 그제야, 저와 세이쥬로와의 관계가 자신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을지 모른단 사실을 깨달았다.
마토바 케이고는 겸허하지도 제 위치를 모르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았다……. 타고난 재능과 갈고닦길 한 번도 포기한 적 없는 노력을 지녀, 결국 히어로를 대표하는 희망의 상징이 될. 토도로키 겐쥬로의 이름을 잇게 될 그가.
‘토도로키 겐쥬로의 손자’라는 이름에 평생 갇혀 지내야만 할 이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지.
마토바 케이고는 토도로키 세이쥬로의 재능을 모른다. 세이쥬로의 실력과 마음가짐, 성격, 그가 어떤 사람이며 제 할아버지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모든 것을 몰랐다. 케이고가 아는 것이라곤 상대의 이름 다섯 글자가 전부였고, 그가 지닌 얄팍한 호의는 오로지 토도로키 겐쥬로에 의하여 비롯된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무지에 하나의 앎이 더해졌다. 마토바 케이고의 존재는 토도로키 세이쥬로를 갉아먹을 독이다. 그것은 일종의 확신이었다. 그는 세이쥬로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었음에도, 세이쥬로의 낯 속에서 일렁이던 감정이 남기고 간 잔상만은 선명했다.
그날, 평생 잊을 수 없을 벽을 마주한 것은 세이쥬로만은 아니었다.
마토바 케이고는 삼 년 전의 어느 날 품었던 생각을 완전히 내버렸다. ‘사형이라.’ 역시 그날 세이쥬로에게 접근하지 않는 쪽이 맞는 선택이었군. 얄팍한 욕심은 그 문장만이면 완전히 끝이 났다. 겐쥬로의 뒤를 잇는 것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토도로키 겐쥬로가 사라져버린 일본에는 새로운 구심점이, 희망의 상징이 필요하다……. 현실은 분명하여, 팔라딘은.
마토바 케이고는 감히 소망했다. 토도로키 세이쥬로가 토도로키 겐쥬로에 준하는 재능을 지닌 원석이기를. 그리하여 지금은 벽을 느끼고 절망할지언정, 언젠간 그와 등을 나란히 할 수 있는 재목으로 성장하길.
스승님의 가족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 그건 모두를 지켜낸 영웅이 품기엔 지나치리만큼 소박한 바람이었다.
그날 이후, 팔라딘은 토도로키 세이쥬로에게 접근하고 싶다는 바람을 완전히 내버렸고, 자신의 위치에서 제 사명을 다하는 것에 모든 힘을 쏟으며 살아왔다. 세상은 팔라딘의 이름을 연호했고 모두가 알고 있듯 팔라딘은 단 한 번도 그 부름을 배신한 적 없었다.
가족을 잃고 사이드킥을 잃었음에도 팔라딘은 멈춰 서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대의 따위가 지긋지긋하단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팔라딘의 모든 상실은 자신의 의무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으므로, 그의 의무가 그리 쉽게 내버릴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리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그는 자신의 가족을 지키지 못하고 사이드킥의 가족을 지키지 못한 책임에 짓눌려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가진 것을 잃고 소중한 것이 사라져 갈수록 마토바 케이고는 거듭 죽음이 싫어졌다. 누군가가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신의 절망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택한 길이란 결국 타인의 삶을 수호하는 것이었고, 비극적이게도 그에겐 그것을 이룰 힘이 있었다.
날이 갈수록 팔라딘이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는 무거워졌으나 그는 그 무게조차 기꺼이 짊어지고자 했다. 그 사이 무엇이 썩어들어가는지는 알지 못한 채, 팔라딘은 그것이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힘이 있었음에도, 되려 그랬기에 가족을 잃고 동생 같던 존재에게 원망받고 자신의 잘못이 아닌 책임을 수없이 짊어지고 세 번째의 상실을 겪었음에도 타인에게 힘듦 하나 토로하지 못했다.
팔라딘은 명실상부한 희망의 상징이었지만, 우습게도 팔라딘에게 희망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마토바 케이고는 고작 인간이다. 그 사실을 알아준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흐른 시간이 7년이었다. 무언가가 뒤바뀌기에는 지나치리만치 충분한, 그러나 No.1이라는 상징만은 변하지 않은 채 그저 흘러간. 그런 시간을 넘어.
과거의 팔라딘과 같은 나이, 스무 살. 루키가 히어로로 데뷔했다.
마토바 케이고는, 종종 스승님에 대한 상념이 치밀어 오를 때가 아니고서야 세이쥬로에 대해 반쯤은 잊은 채(더 정확히는 잊으려 한 채)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의무만으로도 지나치리만큼 바빴던데다가, 7년 전의 어떤 기억이 흐려질 일은 없던 탓이었다.
팔라딘이 토도로키 세이쥬로를 위해 해줄 수 있던 것이라곤 그가 ‘토도로키 겐쥬로의 제자’가 아닌 ‘팔라딘’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언제고 압도적인 활약상을 내보이는 것뿐이었다. 그가 토도로키 겐쥬로의 전승자라는 이름 아래 세이쥬로와 엮이는 순간부터, 세이쥬로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는 겐쥬로의 것 하나가 아니게 될 것이었으므로.
과거의 전쟁이 잊히고 토도로키 겐쥬로보다도 팔라딘이라는 이름이 더 유명해졌을지 모를 지금에서조차 그는 세이쥬로와의 거리를 좁힐 생각이 없었다. 마토바 케이고는 본디 그런 인간이었다.
그러므로 마토바 케이고가 하필 토도로키 세이쥬로의 데뷔일에 그 자리에 서 있던 것은 단순한 우연에 불과했다.
폭음이 울리는 시가지. 늦지 않게 현장에 도착한 마토바 케이고는 세이쥬로와 빌런의 대치를 처음부터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위기 상황이 아니라면 세이쥬로와 엮일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란 판단이 절반, 그리고 그의 실력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절반 뒤섞인 결과였다.
‘하필 폭탄 테러범인가.’
어떠한 비교(세간이 아닌 토도로키 세이쥬로의 내면에서 이루어질)는 그 자체로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팔라딘은 자신이 저 자리에 나서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이란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었으나, 과거의 어느 날 품었던 기대가 무색하게도, 세이쥬로는 빌런을 물리치지 못했다. 팔라딘은 그것이 실력이나 재능 따위의 문제가 아님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한 이는 무기의 궤적조차 흔들릴 수밖엔 없다, 파악은 순식간에 이루어졌고.
“───도와주세요!!!”
먹먹한 폭음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내리꽂힌 순간, 팔라딘은 이미 현장에 몸을 내던진 채였다.
언제나 그러했듯…… 빌런을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팔라딘은 압도적인 힘으로 사건을 정리했고 아이의 외침에 화답했다. 남은 것이라곤 엉망이 되어 버린 현장을 수습하는 그의 몫조차 아닌 일뿐. 그러나 팔라딘은, 인질이 되었던 아이의 상태를 살피면서도 조금 전 폭발에 휩쓸린 세이쥬로가 계속 신경 쓰였다. 동시에 뒤를 돌아 그를 마주하는 것이 조금은 버겁게 느껴졌다. 실제로도 그는 당장 몸을 빼고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 순간에도 몇 번이나 고민했다.
어떤 강대한 빌런을 마주했을 때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을 그가 친애하는 것들은 너무나 쉽게 안겨주곤 한다. 그건 그리 새삼스러운 사실은 아니었다.
가늠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토바 케이고는 결국 세이쥬로에게 다가갔다. “토도로키 세이쥬로…… 인가.” 문장은 일종의 자기 확인을 닮았고, 케이고는 그제야 오늘의 만남이 세이쥬로에겐 팔라딘과의 첫 대면일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일전의 만남은 대면이라 칭하기엔 다소 어폐가 있었으니…….
‘서로의 데뷔일에만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군.’
세이쥬로는 과거의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생각을 흘려낸 팔라딘은 피투성이가 된 상대의 낯을 먼저 살폈다. 폭발의 세기를 보고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 흉은 남을지언정 생에 지장이 갈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다. 그래도 빨리 치료받긴 해야겠군, 파악은 빨랐다.
그 시점까지의 팔라딘은 여전히 세이쥬로를 위해서라도 상대와 거리를 좁히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팔라딘은 그 명성만큼이나 많은 히어로와 연이 있는 사람이니 인사를 나누는 정도는 상관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그가 세이쥬로를 무시하고 돌아가는 것이 더 기이한 꼴일 터다. 팔라딘의 행위는 딱 그 정도의 가늠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상대를 바로 놓아주는 것이 세이쥬로의 신체와 마음 둘 모두에 나을 것이란 사실을 앎에도 다음의 문장을 내어버리곤 만 것은, 지울 수 없는 의문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전에는, 왜 그렇게 움직인 거지?”
그 사람의 손자이자 계승자인 네가…… 고작 그 정도일 리 없을 텐데. 그것은 여전히, 토도로키 세이쥬로보다는 토도로키 겐쥬로를 향한 믿음에서부터 비롯된 문장이었다. 팔라딘은 세이쥬로의 움직임을 복기해 보았다. 검 끝의 흔들림은 아직 완전히 다듬어지지 않은 자의 것. 미숙함은 곧 마음에서 비롯된다. 데뷔전이라 지나치게 긴장이라도 한 건가, 생각이 무색하게도.
“탓하시는…… 건가요? 제가 전부 죽일 뻔했으니까?”
마토바 케이고는 토도로키의 시선에서 과거와 닮은 결을 읽어냈다. 염세적이고 체념에 젖은 시선은 자신의 한계를 이미 재단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의문이 떠오르면,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세이쥬로에 대해 무엇도 알지 못했던 때, 백지 위에 아로새겨진 토도로키 세이쥬로의 ‘고작 일부’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했기에. 결국 팔라딘이 판단하는 토도로키 세이쥬로란 그 결을 따를 수밖엔 없었다.
“탓하는 것이 아니다. 이유를 물었을 뿐.”
답은 두뇌를 거치지 않고 반사적으로 내어졌다. 이어서, 짧은 침묵. ‘팔라딘이나 토도로키 겐쥬로의 그늘에서 벗어나 너의 삶을 살아라.’ ‘혹시 벽에 막혀 있다면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네 재능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너와 네 스승님을 믿어라.’ 문장이 몇 개나 떠올랐으나 그는 세이쥬로에게 그중 무엇도 고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의 짐작이 맞을지조차 불분명했던데다가, 상대가 그런 것 따위를 반길 리 없다는 확신이 선명했던 탓이었다. 대신.
“나는 네가 히어로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건 네가 토도로키 겐쥬로의 손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야.”
“농담이죠? 차라리 비난을 하지 그래요? 이따위로⋯⋯. 일 처리 해놓은 현장에 등장해 놓고서.”
“도시가 고작 이 정도만 부서진 건 네가 저것의 이목을 훌륭하게 끌어 주었던 덕분이고, 아이가 내일을 잃지 않은 건 내가 이곳에 도달할 때까지 네가 빌런의 발목을 붙잡아 줬기 때문이다. 세이쥬로. ……루키. 이것이 히어로인 네가 지켜낸 풍경이다. 다른 사람이 너를 무어라 펌하한다 해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아.”
상황에 걸맞지 않을 투박한 문장은 얄팍한 위로에 가까웠다. 굳이 팔라딘이나 토도로키 겐쥬로와 너의 삶을 비교할 필요는 없다, 너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히어로다. 그러니 그리 위축되어있지 마라. 나는…… 나는 너를,
“그러니까 푹 쉬어라. 뒷일은 내가 맡겠다.”
“아⋯⋯.”
네가 믿지 못하는 너를 믿는다.
일방적인 선언은 그 나름의 진심이었다. 정말로, 처음 소년의 뒷모습을 마주했을 때부터 그의 믿음은 변치 않았다. 언젠가 세이쥬로가 제 재능을 전부 개화하고 어엿한 히어로가 되면 등을 맞댈 동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품었던 바람은 소박하다면 소박한 것이었으나, 소망의 주체가 팔라딘임을 고려하자면 그리 가벼운 것은 아니었으리라.
팔라딘은 토도로키 겐쥬로의 과거를 기억했고, 과거의 미숙했던 자신을 알았다. 팔라딘의 데뷔가 특별했던 것이고, 처음은 누구에게든 서투른 것이 당연하니, 날이 조금만 더 지나면 세이쥬로도 훌륭한 히어로로 성장하겠지. 토도로키라는 성이나 팔라딘이라는 존재를 벗어나 그와 버금가는 히어로가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고독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의…… 일종의 기원에 가까웠다.
하지만 출혈을 이겨내지 못하고 기우는 몸에 깃든 감정을 마주한 순간, 마토바 케이고의 모든 바람은 산산이 조각나 버리곤 말았다. 토도로키 세이쥬로에게 드리운 팔라딘의 그림자는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고, 두 사람이 선 위치는 칠 년 전의 그날과 비교하여 무엇도 달라지지 않았다.
“왜 하필 당신이…… 나와 같은 시대에, 살아 있는……”
고작 한 줄의 문장에 섞인 감정의 깊이를 마토바 케이고는 차마 짐작조차 하지 못하여, 깨달음은 벼락같이 찾아왔다.
“히어로인 걸까.”
찬란했어야 할 너의 현재를 죽여버린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구나.
마토바 케이고는 무너지는 소년의 몸을 붙잡지 못했다. 불가항력처럼.
* * *
마토바 케이고가 인간 토도로키 세이쥬로에 대해 알아야겠다 여긴 것은, 그날로부터 삼 주가량 뒤의 일이었다.
마토바 케이고는 토도로키 세이쥬로를 죽인 것이 팔라딘이란 사실을 알았지만, 그는 고작 그런 이유로 멈추기엔 너무 먼 길을 걸어왔다. 그에겐 수호의 의무가 있었고, No.1을 연호하는 목소리는 거세질지언정 줄어들 기미 보이지 않았으며, 그는 과거 자신의 사이드킥이 증오의 목소리를 토해냈을 때에도 꿋꿋하게 의무를 수행해왔던 인물이었으므로.
다만 팔라딘은,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알았음에도 얄팍한 동정 하나를 내버리지 못했다. 아니, 그것보다는 죄책감에 가까웠을지도.
팔라딘은 토도로키 세이쥬로와 최대한 엮이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많은 것이 부족할지 모른단 사실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그가 세이쥬로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무엇인가, 다음의 물음은 그것이었고, 그제야 케이고는 무지의 장벽을 마주했다.
인터넷에 검색하여 나오는 몇 줄의 염세적인 문장만으로는 세이쥬로를 파악하기 요원했고 그렇다고 그 이상 들쑤시기에는 팔라딘의 이름값이 무거웠다. 그랬다간 그가 “루키”에게 관심을 가졌단 소문이 고작 일주일도 되지 않아 히어로 사회에 파다하게 퍼질 것이었다……. 그건 일종의 확신이었다.
길고도 짧은 고민을 이어가던 팔라딘은 결국, 이번에도 멋대로의 결론을 쥐었다. 내용이란 곧 그런 낯을 하고, 그런 말을 뱉으면서도 히어로이길 택했다는 것은 결국 세이쥬로도 어떠한 욕심을 지녔을 것이란 것. 바람이 없으면 질투도 없고 비교하지 않으면 격차에 절망하지도 않는다. 비록 지금은 체념에 젖어 있다고 한들, 질투와 열등감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보통 팔라딘은 누군가와 직접 비교되는 존재가 아니었고 그는 진정으로 포기해버린 이의 낯을 알았으므로 추론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결론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그가…… 토도로키 세이쥬로의 곁에서 그의 개화를 도울 수 있는가? ‘나를 동정하냐는 말이나 들을 텐데.’ 그 한마디면 모든 충동이 잦아들었다. 팔라딘은 낮은 숨을 뱉었다. 무엇이든 하고 싶었음에도 무언가를 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다. 그러고 나면 문득 의문이 드는 것이다. 세이쥬로를 저리 절망시킨 것이 팔라딘이라 한들, 일련의 과정에 그의 잘못은 개입되지 않았고 그는 죄인 따위가 아닌데. ‘왜 나는 이렇게까지…….’
내가 무슨 자격으로.
무언가를 자각하면, 속절없이 속이 울렁였다. 팔라딘은 자신의 강함이 누군가를 절망시키는 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앨런의 거죽은 여태 사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사라질 수 없을 것이었다. 자색의 번개는 앨런의 것을 닮았고 그는 그 사실이 못내 괴로웠다. 현실을 곱씹을수록, 그는 절대 그럴 수 없는 사람임에도, 무언가에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팔라딘의 삶이란 곧 상실의 역사. 그는 언제고 후회하는 삶만을 살았다. 그리하여 마토바 케이고는, 이대로 세이쥬로를 못 본 채 외면해 버린다면, 상대가 자칫 어긋나거나 잘못되어 버리기라도 하는 순간 자신이 과거의 어느 순간처럼 깊이 후회해 버리곤 말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편애의 이유는 그것만이면 차고 넘쳤다. 따라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채 세이쥬로에게 접근할 수 있을 방법 따위를 고민하던 케이고는, ‘세이쥬로와 팀을 맺는다면…….’ 끝내 하나의 방법을 찾아내지만.
팔라딘이라는 존재 아래 평화를 되찾은 도쿄에서는 그 팔라딘이 팀을 이루어야 할 정도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고, 세이쥬로만을 팀에 끌어들이기에는 당장의 당위성도 부족했다. 그와 세이쥬로의 관계를 멋대로 떠들어 댈 목소리를 상상해 보던 팔라딘은 결국 이전까지의 자신이 지녀본 적 없었던 팀이라는 선택지를 당장은 유보해 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고작 수개월 뒤. 바람을 이룰 수 있는 때는 생각보다도 빨리 찾아왔다.
히어로 사회의 일선에 선 팔라딘은 유력한 빌런들이 팀을 이뤄 모이고 있단 사실을 누구보다도 빨리 전해 들었다. 팔라딘은 강한 인물이지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테러를 홀로 막을 수는 없었다. 팀을 이루는 것이 좋겠다…… 결론을 쥔 순간, 팔라딘이 가장 처음 떠올린 것은 톱 히어로도 쟁쟁한 서포트 인력도 아닌 토도로키 세이쥬로의 이름이었다.
본래라면 팀에 초대될 리 없을, 말 그대로의 루키. 하지만 팔라딘의 추천이라면 사람 하나 정도를 팀에 추가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이전부터 품고 있던 바람이었는데다 그는 세이쥬로의 가능성을 믿었으므로, 망설일 이유는 당연하게도 없었다.
“이름 있는 빌런들이 팀을 이루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키의 데뷔 이후로 나누는 첫 대화가 이거라니. 상대가 무어라 생각하고 있을지가 궁금하군. 시시콜콜한 잡념 몇을 넘어.
“루키, 함께 싸워주겠나. 내게는 네 힘이 필요하다.”
팔라딘은 선언한다. 과거의 선언도 믿음도 여즉 변하지 않았으니.
내가 감히, 너와 함께 싸우고 싶다고.
* * *
브레이커스라는 이름 아래 모인 것은 총 일곱. 그 사이에는 당연하게도 토도로키 세이쥬로의 이름도 자리해 있었다.
빌런들의 동향은 심상치 않았으나 팔라딘은 작금의 상황 자체를 걱정하진 않았다. 어떤 강대한 적이 뭉쳤다고 할지언정 그는 승리할 자신이 있었고, 애초에 그가 팀을 소집한 것조차 승리할 방법이 아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을 물색하기 위함에 가까웠다.
팀을 믿었고 자신을 믿었으므로 흔들릴 이유는 없었다. 예고장의 내용이 뒤바뀌고 세이프 하우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터져나갈 때조차 팔라딘은 굳건했다. 블래스터라는 빌런이 기묘한 기시감을 안겨주는 것만이 다소 신경 쓰였으나, 팔라딘은 그 기시감 또한 별것 아닐 거라고 여겼다. 그야 팔라딘의 약점은 과거에 이미 다 스러져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그런 그가……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은 것은 블래스터의 민낯을 마주한 직후부터였다.
앨런 니시자키라는 이름을 한 악몽이 팔라딘에게 찾아왔다. 과거의 잔향은 선명하여 팔라딘은 상대의 행보를 부정하지도, 저항하지도, 그에게 맞서려 들지도 못했다. 다른 이들이 블래스터에 관해 물어 와도, 낼 수 있던 답이라곤 도쿄를 잘 부탁한다는 상투적인 문장뿐이었다.
증오는 새삼스럽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아팠고, 상대에게 맞은 총탄은 상처를 치유한 뒤에도 흔적이 지워지지 않았다. 속절없이 침식률이 치솟을수록 어떠한 망상이 그를 충동질했다. 그것이 레니게이드 바이러스가 불러낸 망집이라는 사실을 앎에도 팔라딘은 블래스터의 삶을 멋대로 가늠하길 멈출 수 없었다. 나이트링크스가 죽었다고 여기고 살아왔던 지난 2년, 앨런 니시자키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살아있단 사실을 숨긴 채 어둠 아래 살아왔을 2년. 그 시간이.
앨런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마토바 케이고는 문득 모든 것이 아득해졌다. 앨런의 존재란 곧 팔라딘이 지켜내지 못한 삶의 증명이자 재현이었다. 앨런 니시자키는 빌런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앨런이 졈이라면, 그러면.’ 하나의 문장만이 남는다.
‘나는 앨런을 한 번 더 잃어야 하는 건가…….’
팔라딘은 무결하지 않았고 그 사실은 마토바 케이고가 가장 잘 알았으나 그 사실이 그로 하여금 더욱 수호의 의무에 매달리도록 만들었다. 토도로키 겐쥬로와 마토바 케이고의 가족, 앨런 니시자키의 죽음이 빚어낸 것이 작금의 영웅이었으나 그 끝에서 케이고는 결국 앨런에게 검을 겨누어야 하는 현실을 마주했다.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 문장을 곱씹어 보았다.
가까이 있는 이 하나 지키지 못하면서, 무엇이 수호신이라는 말인가……. 귀결은 참으로 우스웠다.
그는 여전히, 앨런 니시자키를 잃고 싶지 않았다. 고작 그가 패배했다는 사실 하나에 시선이 뒤흔들리던 이의 모습을…… 토도로키 세이쥬로의 낯을 떠올려 보았다. 블래스터가 무너트리길 바라는 것이 곧 히어로라면 참 훌륭한 성과라고 밖엔 칭할 수 없을 것이다, 결론을 쥔 순간 마토바 케이고는 낮게 자조했다.
팔라딘이 흔들리면 히어로 사회가 무너진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오롯이 마토바 케이고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래서는.’ 세이쥬로를 향해 믿음의 말이나 허울 좋은 응원 따위를 뱉으면서도 케이고는 어떤 불안을 내버리지 못했다. 불안일지, 예감일지 모를 것은 그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진 않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시사하고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끝이나 죽음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존재 하나에 이리도 흔들리는 이가 지금까지처럼 희망의 무게를 견인할 수는 없었다…….
희망의 끈을 이어줄 존재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누가?’ 답은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과 다름없었다. 염세적인 척 굴면서도 위기의 상황에서는 몸부터 내던지는 행동거지와 아직 갈고닦이지 않았음에도 쟁쟁한 히어로들 사이 부족함 하나 없던 실력, 이상적인 히어로를 향한 높은 기준과 그것에 가닿고 싶다 바라는 열망, 그리고.
누구보다도 절절히 인지하고 있을 No.1의 무게…….
세이쥬로에 대해 조사하고 상대의 행적을 살폈을 때부터 미약하게나마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토도로키 세이쥬로, 그라면 마토바 케이고의 뒤를 이을 자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걸 이렇게 이른 시기에 입 밖으로 내게 된 것은 블래스터 탓에 마음과 현실이 조급해진 결과겠지만, “나는 네가 내 후계자가 되어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 문장에는 거짓 하나 뒤섞여 있지 않았다.
팔라딘은 지금의 세이쥬로가 이런 것을 바랄 리 없단 사실도, No.1이란 영광뿐인 자리가 아니란 사실도 알았다. 나는 세이쥬로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절절히 체감했음에도 입을 떼곤 마는 것은, 도쿄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문장 아래 자그마한 위안이나마 품고 싶다 바랐기 때문이었을까.
No.1 히어로는 몸도, 마음도 상처받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었다. 그러니 그가 세이쥬로에게 제 속내를 토로하고 이해를 바랄 수도 없었다. 애초에 그랬다면 세이쥬로가 먼저 그를 탓했겠지.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내면의 흔들림을 외면하고 자신의 끝을 최대한 유보하여 최대한 오래 팔라딘으로서 존재하는 것뿐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아서.
“느긋하게 생각해 달라곤 했지만. 그 정도의 시간은 없을지도 모르겠군.”
끓어오르는 침식과 망상의 늪 아래, 마토바 케이고는 눈을 내리감았다.
일렁이는 마음이 좀처럼 정리되지 않았다. 그것은 불멸의 상흔을 닮아 있었다.
* * *
결국 팔라딘은 누구에게도 제 속을 토로하지 못했다. UGN 측에도 그의 흔들림을 알리지 못한 것은 앨런의 존재를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모르기를 바랐던 탓이었겠으나, 그 결과 그는 No.1 히어로 구속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빚어냈다. 이것이 명백한 그의 잘못이라는 사실을, 팔라딘은 잘 알았지만.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했던 거지.’
그럼에도 그는 어떠한 문장 하나를 끝내 내버릴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비난할 시민이나 영웅의 이름에 맞지 않는 현실보다도 제 내면의 목소리가 더욱 무서웠다. 끓어오르는 충동이란 곧, 그가 인간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단 사실을 표방하고 있던 탓이었다.
과거에도 침식률이 높게 치솟은 적이야 많았다. 그럴 때마다 팔라딘을 붙잡아두었던 것은 인연의 끈이었고, 팔라딘은 이번에도 자신이 돌아올 이유를 잊을 일은 없을 것이라 믿었지만. ‘인연이라.’
그러다 보면 문득 자각하고는 마는 것이었다. 그가 사랑했던 것은 너무나도 많이 스러졌고 마토바 케이고를 지탱해오던 것은 얄팍한 의무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팔라딘은 무너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너지고 싶지 않다는 갈망과는 다소 결이 달랐고, 끝을 돌이키는 순간 미련처럼 남는 것이라곤 절망에 젖을 흑자색 시선과 블래스터를 그대로 두고 싶지 않단 염원뿐이었다. 이 순간조차 그는 히어로에 절망하고 자신에게 절망했을 블래스터의 삶만을 좇고 있었다. 짙은 우울이 마토바 케이고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부디, 앨런 그 아이를…… 부탁한다.”
가장 비참한 것은, 이 순간조차 마토바 케이고는 앨런의 죽음을 바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No.1 히어로가 고개 숙여 부탁하는 것이 빌런의 안온이라니, 참 우스운 꼴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절망은 내 탓이다, 앨런을 막아 달라. 부탁한다. 그것은 상대의 처단을 바라는 목소리가 아닌 악행에 대한 변명이었고 무사를 향한 염원이었다. 멀어져가는 뒷모습 앞에서 내면이 속삭였다. ‘저들이 앨런을 살려두려 할까?’ ‘내가 알던 앨런은 이미 과거에 죽었어.’ ‘동생 같던 존재를 잃으면서까지…… 나는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 거지?’ ‘결국 내가 그날, 앨런의 부모님을 포함한 모두를 지켜냈더라면 없었을 일이다.’ ‘무언가를 잃고 싶지 않다면…….’
수호신의 망집이란 결국 무언가를 지켜내지 못한 자신의 무력감을 향했다. “앨런…….” 팔라딘의 가장 큰 죄악이자 그가 여전히 놓지 못한 미련. 나는 최악의 인간이다. 읊으면, 무거운 숨이 잔상처럼 퍼져나갔다. 그리고.
“왜 그런 표정이세요? 팔라딘.”
적막만이 들어찼던 한밤중. 남자가 찾아왔다.
마토바 케이고는 앨런의 마지막을 지켜볼 수 있게 해주겠다는 남자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끝내.
* * *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 그 바람이 허황된 가치에 불과함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팔라딘은…… 세이쥬로와 앨런이 제 목숨을 걸고, 상대를 죽이기 위한 일념으로 부딪히는 광경을 바라보며 제 바람의 무의함을 절절히 체감하였다.
‘그런 부탁을 해놓고. 이렇게 될 걸,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선을 지키며 사람들을 수호하려 굴었던 결과가 작금의 이 순간이었다. 지금의 그에겐 무언가를 지킬 힘이 없었고 비극의 원인이란 곧 그의 무능. 지켜내지 못한 것의 무게가 팔라딘을 짓눌렀다. 앨런은 그런 꼴이 되어서도 팔라딘의 구원과 절망을 바랐고 그것은 꼭 죽음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웠다.
도와줘. 그 말 하나를 외면하지 못하는 행적과, “나⋯⋯ 이 도시가 지키고 싶었어. 모두가 기대하는 그대로 되돌려주려고. 그게, 내가 줄곧 봐온 등이니까. 가질 수 없는 걸 선망하는 게, 뭐가 나빠…….” 고작 몇 마디의 문장. 그건 분명 팔라딘이 줄곧 바라 왔던 것이었음에도, 마토바 케이고는 세이쥬로의 성장을 기뻐할 수 없었다.
“⋯⋯그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 똑같잖아.”
무언가가 돌이킬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단 사실을 자각한 것도, 분명 그쯤의 일이었으리라.
“그러니까, ⋯⋯나이트링크스. 당신과⋯⋯ 내가 다르기 때문에, 선택받은 게 아니야. 애초에, 선택하라고 한 적도 없는데…….”
기대를 담아, Mr. 코발트가 웃었다. 마토바 케이고의 시선은 블래스터에게 고정된 채였고, 그는 앨런에게 삶의 미련 따윈 무엇도 남아 있지 않단 사실을 어렵잖게 눈치챘다. 망가져 버린 이가 증오와 친애를 기워 붙여 여기까지 발돋움했다……. 그렇다면 그것이 좌절된 후에는?
“이유를 찾자면 당신도 히어로였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다…….”
“……그런가.”
블래스터에게는 무엇이 남지? 화답하듯.
앨런 니시자키가 팔라딘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먼 거리에도 그의 시선은 오롯이 마토바 케이고만을 향해 있었다. 앨런이, 팔라딘이 지금껏 싸움을 지켜보았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곳에 선다는 건 Mr. 코발트의 함정에 나서서 걸려 주는 것이란 사실은 그의 제안을 수락했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토바 케이고는 상대와 시선이 마주했단 착각을 쥔 순간부터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하지만, 팔라딘…… 마토바 케이고. 형.”
일렁이는 마음에 레니게이드 바이러스가 화답했다. 팔라딘은 그것에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후회는 질릴 만큼 해보았다. 무력한 자신을 원망해본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뒤늦게 절망했을지언정 눈앞의 타인을 구해내지 못했던 적만은 없었으므로, 그로선 이렇게까지 자신의 무력함이, 상대를 구해낼 수 없단 현실이 원망스러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마스크 아래의 낯은 당연하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2년의 변모에도 그는 여전히 앨런 니시자키였다. 화상 자국이 가득한 낯이 웃음을 머금었다. 먼 과거의 것과 무엇 하나 다르지 않은 형상을 한 낯이란, 마토바 케이고로 하여금 앨런을 ‘살아 있다’고 여기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것이었어서.
“난, 당신을…… 마지막까지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
────탕! 하고, 무언가가 부서져 내리는 순간, 팔라딘 안의 무언가가 끊어졌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형태를 하고서.
충동이 그를 잡아먹었다. 그것은 곧 슬픔과 절망이었다. 팔라딘의 삶이란 곧 상실의 역사. 그 사실이 변할 일은 없어서, 마지막 순간조차 팔라딘은 모든 것을 후회했고. 다시는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으며. 감히 모든 것을 지키고 싶다고 갈망했다. 나는 죽음이 너무나도 싫다고. 다시는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고. 그것이 내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그 바람을 이룰 수만 있다면, 이제 수단 따윈 아무래도 좋다고.
자신의 갈망이 비정상적이란 사실은 알았지만 팔라딘은 그리 행동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더는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마지막 미련이란 결국 자색 소년의 낯과, 과거의 어느 날 품었던 바람 하나뿐. ‘분명 슬퍼할 텐데.’ 언젠가는 너와 등을 맞대고 함께 싸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끝내 내지 못한 문장을 곱씹어 보았다. ‘세이쥬로, ……미안하다.’ 결국 모든 것은 무의미로 화한다.
‘이것이 나를 위해 마련된 지옥인가.’
팔라딘의 유언은 그것이었다.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
그것이 수호신에게 남은 유일한 망집이었다.
* * *
모든 것의 끝. 다크 나이트…… 마토바 케이고라는 이름을 지녔던 남자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쥔 토도로키 세이쥬로의 낯이 보였다.
우습게도, 그 순간 그가 품은 감정이란 안도감에 가까웠다.
‘훌륭하게 성장했구나. 네 사형을 자처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생의 끝이 임박하였고 모든 것을 지키겠다는 바람이 완전히 무의미해진 지금, 마토바 케이고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고통은 짙었고 죽음은 두려웠으나 그것은 과거의 절망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쿨럭, 피 섞인 기침을 내뱉은 이가 가는 숨을 내쉬었다.
가족을 잃고 사이드킥을 잃고 자신을 잃었음에도 멈추지 못한 채 살아온 7년. 이제야 그는 어떠한 끝을 허락받았다.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내버릴 수 없을 남자의 망집이란 곧 수호의 의미에 가닿아 있었으나.
“그러니까⋯⋯ 계속 이곳에 오는 거야.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걸 히어로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니까⋯⋯.”
네게라면 이 세계의 미래를 내맡겨도 괜찮겠다. 확신이 고개를 들이밀면, 미련은 그것으로 완전히 끝이 났다.
네가 만들어갈 세계를 보지 못하는 건 좀 아쉬운 것도 같다…… 그런 문장 아래, 마토바 케이고는 눈을 감았다.
생의 마지막 숨결에선 희망의 향이 났다.
전설이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