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x3 시나리오 『Crumble Days』 스포일러 포함
그러니까… 어쩌다 이렇게 된 거더라.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 마나카에게까지 가닿을까 신경 기울이며, 이시카와 나가토는 며칠 전 있었던 일을 되짚기 시작한다.
가끔 내가 물어보는 거 있으면 알려줘. 언젠가의 약속은 나가토의 사심 때문에라도 여태껏 충실히 이어져 왔다. 공부 같은 것관 담을 쌓고 살아온 것이 지난 18년간의 이시카와 나가토의 삶이었으나 그것을 가르쳐주는 대상이 아야세 마나카라면 말이 달라지는 법이다. 모르는 게 있어야 질문도 할 수 있단 간단한 사실은 처음으로 나가토의 학구열에 불을 지폈고, 그 결과 나가토는 살며 처음으로 한 달 내내 단 한 번의 무단 조퇴도 하지 않는 쾌거를 이뤘다. (오버드로서의 임무는 무단이 아닌 합법적인 조퇴로 처리되었다….)
이런 형국이니 나가토가 이전에 비해선 훨씬 노력하고 있단 사실은 마나카로서도 알 수밖엔 없었지만, 그의 마음과 하나뿐인 동기 모르는 그녀로서는 나가토가 처음으로 학교생활에 재미라도 붙였나 생각했다더라. 마나카가 나가토의 학교 적응을 더 열심히 도와줘야겠다 생각하게 된 것은 소소한 덤이었고 말이다.
그렇게 대화 사이 질답이 일상이 되고, 나가토조차 그녀와의 공부 일과처럼 여기기 시작할 즈음이면 그로서는 단 한 번도 신경 써본 적 없는 학교의 정규 이벤트가 다가왔다. 이름하여 기말고사. 물론 나가토는 언제나처럼 시험 기간이 곧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 했으나,
“나가토 군, 이번에는 준비할 거야?”
“준비? …뭘?”
“곧 시험이잖아. 요즘의 나가토 군은 공부에 열심히니까! 지금까지랑은 뭔가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아, 응. 해야지. 마나카 네가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그럼…… 이번 주말에 같이 시험공부 할래? 우리 집에서.”
“……에?”
마나카의 말 한마디면 나가토의 속 시험이 차지하는 비중은 완전히 달라져 버리곤 말아서.
단언컨대, 이날은 황룡회의 외동아들이자 요리오카 지부의 일리걸로서 온갖 사건 접하고 살아온 이시카와 나가토가 인생에서 가장 크게 당황한 날이었다…….
* * *
나가토는 어찌할 줄 몰라 하면서도 마나카의 제안 단번에 수락했고, 그 결과가 지금의 이 순간이다. 마나카의 집에서 마나카와 단둘이……. 마나카가 그와 같은 감정 품고 있지 않단 사실 앎에도 작금의 상황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리는 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앞에서 마나카가 친절하게 이어가는 설명조차 곧잘 인지되지 않을 만큼이나.
이시카와 나가토는 슬쩍 눈동자 옮겨 마나카의 모습 바라본다. 고개 숙여 늘어뜨려 진 밀색 머리칼, 이 세상 그 어느 것을 가져다 놓아도 이보다 맑진 않을 것이란 감상 안겨주는 푸른 시선. 호선 그린 채 조곤조곤 설명 이어가는 입 하며 다정하기 짝이 없는 어조, 펜 쥐고 있는 손길과 평소 교복 차림과는 다른 매력의 평상복까지……. 무엇 하나 나가토의 마음 자극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마나카랑 단둘이서 공부라니… 나…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걸까? 이거 혹시 꿈인 건가? 그런 것 같아… 잠시 생각만 해봐도 이건 너무……
“───그래서 답은 3이 나오는 거야. 나가토 군, 듣고 있어?”
“응? 응! 당연하지. 그… 어… ……한 번만 더 설명해줄래? 잘 이해를 못해서…….”
……이시카와 나가토는 제 뺨이라도 한 대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마나카가 앞에서 얘기를 하고 있는 데 방금까지 내가 도대체 뭘 한 거지. 그리고 곧 그는 한 지점까지 생각 가닿는다. 마나카가 그를 위해 이런 제안까지 해줬는데, 여기서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마나카를 실망시킬지도 모르겠다고.
어떻게든… 이 상황에 태연한 감정 품진 못 할지라도!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바보 같은 행동을 피할 순 없을지언정 마나카가 그의 행동에 부정적인 감정 느끼고 돌아서진 않도록. 보아라, 이 순간에조차 그는 무심코 마나카 바라보며 넋 잃곤 말지 않던가. 생각 끊어내듯 눈 꾹 감았다 뜨곤, 나가토는 마나카의 설명 다신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교과서에 주의 기울였다.
주변의 모든 자극이 그의 집중 어그러트렸지만, 필사적으로 마나카의 말 쫓아가니 설명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이시카와 나가토는 불량 학생일 뿐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었고, 아야세 마나카는 나가토가 지금껏 느껴왔듯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마나카는 못하는 것도 없다니…… 하… 내가 또 집중은 안 하고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거람.’ ……시시각각 떠오르는 상념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렇게 해서… 여기에 값을 대입하면 3이 나와. 이번에는 조금 알겠어?”
“역시 수학은 어렵네……. 그래도 마나카 네가 설명해주니 조금은 알 것도 같아.”
“헤헤…. 그치만 그건 나보다도 나가토 군이 좋은 학생이라 그런걸.”
마나카가 배시시 웃음 짓는다. 그것 마주하는 나가토는 일순 눈 멀어버리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역시 마나카는 다정하구나, 내가 더 잘해야지. 생각하며 쥔 펜만 괜히 만지작거리고 있을 적이면, 분위기를 환기하듯 마나카가 한 마디를 더 잇는다.
“우리 조금만 쉴까? 간식거리랑 마실 거라도 가져올게. 공부도 쉬어 가면서 해야지.”
“아. 뭔가 가져올 거면 나도 도울게.”
“아냐, 나가토 군은 손님이잖아.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나가토가 더 무어라 대꾸하기도 이전, 마나카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만을 방에 두곤 바깥으로 나선다. 멍하니 마나카가 나간 문 쪽 바라보던 나가토는 잡념 떨쳐내듯 고개 좌우로 뒤흔든다. 마나카의 집에 있는 내내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시간을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정말로, 뭔가 대책을…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지.
짧은 고민 이어가던 이시카와 나가토는 곧 핸드폰 집어 든다. 라인 메시지 향하는 대상은 정해져 있다. 그의 감정과 더불어 아야세 마나카에 대해서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이, 나카자와 쇼헤이다.
[ 나 마나카 집에서 공부하는 중인데 떨려서 아무것도 못 하겠어 어쩌지 ]
[ 긴장 푸는 방법 같은 거 알아? 안 떠는 방법 같은 거라도 ]
바보 같은 질문이란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답을 얻기보단 조언이라도 듣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만큼 나가토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하의 이시카와 나가토가 이런 것 때문에 쩔쩔맨단 사실 들으면 비웃을 이가 반 믿지 못할 이가 반이겠지만… 어쩌겠는가. 고등학교 입학식 날, 이시카와 나가토는 아야세 마나카에게 첫눈에 반해버리곤 만 것을.
답은 수 분도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다행히도 바쁘진 않은 모양이었다.
[ 초대받고 집까지 갈 동안 아무 생각도 안 한 거야? ]
[ 난 분명 괜찮을 줄 알았다고……. ]
[ 평소에 마나카 앞에서 그렇게 굴면서 괜찮긴 무슨. 그래도 성공했네. 축하해. ]
정보값 없는 연락이 단순간에 수 개나 오간다. “긴장 푸는 방법이나 알려 달라니까…….” 나가토는 괜스레 투덜거려 보나, 마나카 외의 상대와 시시콜콜한 잡담 나누는 것만으로 혼잡하던 마음이 어느 정도 잦아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가토 또한 이런 걸 바라고서 핸드폰 집어 들길 택했을지도 모르고.
그제야 조금 이성이랄 것이 돌아온 듯했다. 나가토는 깊은 숨 내쉬며 화면 다시 들여다본다. 쉴 틈 없이 오가던 메시지에 수 분가량 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매 순간 칼같이 답해주는 것을 바란 적도 없었으므로 별생각은 들지 않았다. 신경 써야 하는 것이라면 답 없는 쇼헤이가 아닌 곧 이 방에 돌아올 마나카……
[ 지부장님이 남자라면 당당히 고백하래♥ 쿠라게 씨는 뭐가 문제인지 이해도 못 하시네. ]
[ 야 너 내 얘기 지부 사람들한테 하고 다녔냐고 ]
[ 호리야마 씨는 임무 나가셨는데 여쭤보고 올까? ]
……취소. 얘 도대체 뭘 하고 다닌 거야?!
나가토의 표정이 와락 구겨지며 자판 두드리는 손가락이 빨라진다. [ d야 당장 그만두고 ] 급히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자면 문이 열리고. “많이 기다렸지, 나가토 군.” 상냥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들려 온다. 나가토는 자신의 상담 내역을 마나카가 보기라도 할까 싶어 급히 핸드폰을 자신의 등 뒤로 숨긴다. 허둥대는 나가토의 모습에 마나카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고, 그러면서도 음료와 과자 담긴 쟁반을 들고 책상의 방향으로 발 딛으며, 바닥에 떨어진 책 한 권에 발끝이 걸린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나가토는 핸드폰 화면을 감추는 것도 잊곤 본능적으로 마나카에게 몸 던졌다. 앉은 자세였다 한들 오버드의 반사신경으론 넘어지는 마나카 붙잡는 것은 쉬웠다. 본능적으로 마나카에게 손 뻗느라 그를 향해 쏟아지는 쟁반이며 음료 따위는 완전히 무시해버렸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으앗,” 마나카의 목소리,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그런 건 신경조차 쓰이지 않을 정도로 가까워진 온기 하며 그의 가슴팍 위 얹어진 손. 마나카가 나가토의 어깨 위 가닿았던 고갤 천천히 들어 올리면, 나가토는 두 사람의 간격이 숨조차 가닿을 정도로 좁다는 사실 인지한다.
쇼헤이와 메시지 주고받느라 가라앉았던 심장 다시금 맥동하기 시작한다. 불가항력처럼.
시선이 마주한다. 고작 수 초의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이시카와 나가토는 지금의 이 거리 영원토록 멀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욕망만으로도 이펙트가 발현된다면 그는 무심코 시간의 흐름 조정해버리곤 말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람 무색하게도 시간은 흐른다. “나, 나가토 군! 괜찮아?! 옷이 다…… 우악, 핸드폰도…!” 찰나의 공백을 다급히 소리치는 마나카의 목소리가 깨트린다. 마나카가 나가토의 몸과 엉망이 된 바닥을 살핀다. 옷이 온통 축축했다. 바닥을 짚은 손끝에서 차가운 물기가 느껴졌다. 뒤늦게 밀려들어 온 감각이 현실에서 유리되었던 그를 끌어당긴다. 그제야 나가토는 정신을 차린다. 꿈에서 깨어나듯.
당황에 젖은 티 감추지 못하곤 마나카가 선반 위의 휴지 집어 든다. 그제야 나가토도 황급히 바닥에 반쯤 던져둔 휴대폰 손에 쥔다. 물에 젖은 휴대폰의 안위 걱정되었다기보단 라인 메시지 오가던 화면 마나카에게 보일까 싶은 마음에서다. 다행히도 그사이 화면은 꺼져 있었다.
안도의 숨 내뱉은 나가토는 이어 음료를 흠뻑 머금은 책 몇 권을 내려다본다. 오늘 더 공부하긴 글렀군……. 아니, 공부만 글렀겠는가? 여벌 옷도 없는 마나카의 집에서 샤워를 할 순 없는 노릇이니 벌써부터 집으로 돌아가야 할 터다. 잔뜩 기대하고 나온 데이트(아님)가… 몇 시간도 안 되어서……. …그래도 가닿은 순간 느껴진 선명한 온기 때문일지, 마냥 나쁘기만 한 기분은 아니었다. 마나카가 잔뜩 당황했단 사실만을 제외하자면 말이다.
“마나카, 나 진짜 괜찮아. 옷이야 세탁하면 되는걸.”
“그치마안……. 나 때문에 나가토 군의 교과서가…….”
마나카는 휴지로 급히 바닥에 엎어진 음료 하며 나가토의 손 닦으려다 이내 다시 허둥지둥 일어나 수건 몇 개를 들고 방으로 돌아온다. 가방에 옷, 교과서까지 전부 젖어버린 탓에 그 과정이 무척 정신없긴 했지만 상황 자체는 금방 정리되었고, 그러는 내내 마나카는 수 번이나 나가토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야세 마나카는 너무나도 다정하고 상냥해서, 물론 그는 그런 마나카의 성격을 사랑해 마지않았지만, 이런 상황이면 조금 곤란하단 생각마저 들어 버리곤 만다. 그는 온통 끈적거리는 몸보다도 넘어지며 놀랐을 마나카가 훨씬 더 걱정되었는데, 마나카 앞에서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내뱉을 순 없던 탓이다.
마나카는 여전히 울적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가토는 분위기를 환기할만한 말 몇 마딜 떠올려 본다. 폭력의 세계 아래 살아온 이시카와 나가토는 이런 부분에서만은 미숙하기 짝이 없어서, 말실수나마 하지 않기 위해 문장 몇 개를 고르는 것이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그는 그 사실이 문득 애석하게 느껴졌다.
“교과서야 새로 사면 되는 거고. 시험공부는… 앞으로도 학교에서 계속 가르쳐줄 거잖아. 그럼 된 거지 뭐.”
“오늘은 뭐라도 잘하고 싶었단 말야.”
“평소에도 매번 잘하면서.”
“그런 의미가 아니라구!”
장난스레 나가토를 쿡, 찌른 마나카는 잠시 망설이는 듯 말이 없더니 무릎을 모은 채 벽에 등을 기댄다. 조곤조곤 읊는 목소리란 평소와는 조금 다른 기색을 품은 채다.
“지난번의 버스 전복 사고 이후로 나가토 군은 언제나 고민이 많아 보였거든.”
방금도 휴대폰으로 엄청 중요한 연락한 거 아냐? 안 보여주고 싶어 하던 것 같은데. 소곤거리듯 덧붙이는 목소리에 나가토가 어색하게 눈을 피한다. 둘 모두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사정 설명할 수 없던 탓에 좀처럼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마나카는 돌아오지 않는 답 긍정의 표시로 알아듣고, 흐린 웃음 지으며 말 잇는다.
“부모님의 일도 그렇고, 나가토 군에겐 내가 모르는 힘든 일이 자안뜩 있을 거란 사실을 알아. 그래서 그걸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는데… 덜렁거리다 이렇게 돼버렸네. 나 정말 바보 같지. 헤헤…….”
네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 이 순간의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그런 한마디의 말 입 밖으로 내는 것이 왜 이리도 껄끄럽게 느껴졌을까. 이시카와 나가토는 아야세 마나카의 앞에서 자그마한 거짓이라도 고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 모르고, 또 어쩌면 자신을 위한 마나카의 마음 불필요했던 것이라 치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몰랐다. 저 짧은 몇 마디의 말을 아야세 마나카가 얼마나 고심하고, 고민한 끝에 내뱉은 건진 마나카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으니까.
이시카와 나가토는 자신이 오버드라는 사실을, 그런 존재로 각성함으로써 떠맡게 된 의무를, 불완전한 존재와 괴물이 되어버릴지 모를 미래를 마나카의 앞에선 평생토록 이야기하지 못 할 것이다. 그것은 생의 대전제다.
하지만 동시에 이시카와 나가토를 일상에 붙드는 가장 큰 존재는 아야세 마나카였다. 오버드에게 로이스가 갖는 의미 이상으로. 어쩌면 사랑이라는 어절로도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 그러니 나가토는, 무엇 때문이든 마나카가 수면 아래 잠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앞서면 생각은 그다음이다. 날 것의, 정제되지 않은 어절이 내뱉어진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라도. 네가 그 자리에서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을 낼 수 있어. 도움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야. 친구… 라는 건 그런 거잖아.”
“그게 뭐야.”
“정말이야. 마나카 넌… 어떤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 줄 거잖아. 그게 얼마나 든든한 일인데.”
“……그건 맞지만! 나가토 군도 치사해. 그러면 내가 아무런 말도 못 하게 되어버리잖아.”
볼을 부풀리는 마나카 바라보며 나가토는 부스스 웃음 흘린다. 묘하게 가라앉았던 공기는 그 말 몇 마디만으로 유하게 헐거워지나 공간엔 이어 정적이 자리한다. 전하지 못할 말, 평생토록 허물어지지 않을 벽. 그 사이에서 겨우 전한 한 줄기의 진심. 고작 그것에 아야세 마나카는 만족할 수 있을까. 나가토는 답 알지 못한다. 만족하길 바라는 것이 더욱 주제넘은 짓일지도 모르고.
다만 이시카와 나가토는 생각한다. 친구라는 이름 하에나마 마나카와 자신 묶어 이면 아닌 곳에서의 생 살아가고 싶다. 모든 진실 내어주진 못 할지라도 거짓만은 전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그녀와의 일상에서 체류하고 싶다. 이는 당위보다도 갈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범죄 조직의 아들로 태어나 오버드로 각성하여 평생 일상과는 먼 생 살아왔지만, 그것에 반항하고 싶단 마음조차 허락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 끝자락 붙잡는 것까지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아버지에게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배신자라 매도당하더라도. 폭력이 끊이지 않는 생 사이에서 그가 붙잡은 단 한 줄기의 빛이란 그런 의미였다.
그러니, 자꾸만 욕심이 나곤 마는 것이다. 고백할 용기도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이야기할 수 없는 비밀을 품고, 친구라는 명명 하에 몸을 숨기면서까지. 나는 너와의 시간 조금 더 보내고 싶다고…….
무릎 아래 고개를 묻은 마나카를 흘끔 바라본다. 이번에는 정제할 시간도, 그만둘 여유도 충분했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마나카의 용기 하며 그녀와의 소중한 시간 이런 방식으로 끝맺어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분명하여, 이시카와 나가토는 충동에 몸을 맡기기로 한다. “마나카. 그러면 말야.” “응?” 몸이 앞으로 기울어진다. 이시카와 나가토는 부러 마나카와 시선 맞춘다. 나가토가 자그맣게 웃음 지어낸다. 개구쟁이 소년처럼.
“오늘의 일, 많이 미안하면…… 이번 주말에 나랑 같이 서점에라도 가주지 않을래. 젖은 교과서도 다시 살 겸.”
무얼 생각하는지 모를 짧은 간극. 이어 아야세 마나카의 눈꼬리 부드럽게 휘어지며 찬란한 웃음 떠오른다. 이시카와 나가토가 처음으로 마주했던 그 얼굴과 꼭 닮은 낯이다. “응, ……얼마든지.” 고하는 목소리가 적막한 공기 색채로 가득 물들인다.
그 모습 바라보며 이시카와 나가토는 생각해 버리곤 만다. ‘난 평생토록 널 향한 사랑 지워내지 못 할지도 모르겠어.’ 또한 그는 다짐한다. 그의 태생이 어떠하고 그의 집안이 어떠하든, 그는 파괴가 아닌 수호 위해 평생을 바치고는 말 것임을.
그는 아야세 마나카의 일상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말로, 무엇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