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세계에는 언제나 눈이 내렸다.
한때는 누군가의 생이었을지 모를 백색 파편을 앞두고 감상에 젖어드는 이는 이전의 과거에도 그리 많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런 것 앞에서 애환과 슬픔을 느끼기엔 모두가 여지없이 멸망에 지쳐 있었다. 상실은 필연이며 체념이 곧 삶이던 세상, 그곳이 지은결과 강예희가 살아가는 장소였다.
쉘터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에는 새로운 삶과 인연을 향한 희망 따윌 품었던 것도 같은데……. 지금 와 남은 것은 모든 걸 집어삼킬 듯 불타오르던 쉘터의 잔해조차 세계의 추위를 사그라트리진 못했다는 잔혹한 진실뿐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도망쳤다. 어떠한 죽음에서, 불꽃에서, 추위에서.
무언가를 외면하고 눈 돌리는 행위는 어렵지 않았다. 죽음의 무게는 동등하지 않다는 하나의 사실을 제하고서도…… “그게 널 살릴 거야.” 지은결은 절망했을지언정 꾸역꾸역 살아가는 법을 알았고, “다른 건 잊어도, 네가 가진 불씨를 잊진 마.” 죄책감은 그 자체로 삶을 강제했던 탓이다.
은결은 누군가의 삶을 잡아먹고서야 쥔 내일을 포기할 권리를 지니지 못했다. 희망의 불씨는 이양되어야 한다는, 은결의 것인지 타인의 것인지조차 알지 못할 얄팍한 소망 하나. 그것이 부정성 짙은 그로 하여금 내일을 바라게 만들었다.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 해도 좋았다. 은결은 이러한 세계라 한들 살아남은 이는 존재할 거라 믿었다. 살아갈 방법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것은 희망이라기보단 아집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은결의 곁을 따르는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예희였음은 적어도 그에겐 일종의 축복이라 불려 마땅했다. (예희에겐 미안한 말이겠으나) 생존력 제로에 멸망에 편승하여 생 연명하는 방법 하나 모름에도 세계에 발붙여 살아가고 있는 상대의 모습 바라보고 있자면, 그들보다 유능하고 뛰어난 사람 한둘이 냉기 서린 도시에서 삶을 꾸려가는 풍경을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었으니까. 소망은 곧 공상이 되어 꺼져가던 불씨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은결과 예희의 여정은 그러한 공상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희망이 부재한 세계에서 인간은 살아갈 수 없고 얼어붙은 도시에서의 삶을 위해서는 온기가 필요했으므로, 은결은. 그리고 예희는. 살아가기 위해 그런 것을 바랄 수밖엔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명백하여, 그 희망이 배반당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쉘터를 나선 이후, 은결과 예희는 눈에 파묻힌 도시에서 누구의 그림자도 마주하지 못했다. 불을 지핀 흔적, 눈 위에 찍힌 발자국, 하다못해…… 죽은 이가 남긴 옷자락 하나까지도. 모든 것이 눈 아래 파묻혔다. 죽음을 증명하는 눈송이는 사위에서 흩날리는데도 생에 대한 증명은 무엇도 허락되지 않아서, 은결과 예희는 기척 없이 텅 빈 도시의 마천루에서 아득한 감정을 느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뭐, 뭔가를… 놓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요. 쉘터…로… 돌아가 보는 건…….”
쉘터에서 겨우 도망쳐 나온 주제에 그들이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가야겠단 결심 품고 만 것은 쉘터 바깥이 그곳보다 더한 지옥도였단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타인의 존재 선명했던 그 공간에서라면 여즉 남은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잔재한 소망의 형태란 도망칠 곳 부재한 현실 도피를 닮아 있었다.
벗어나기까진 그리 많은 계획과 희생 필요했던 장소였음에도, 쉘터에 다시 돌아가는 건 너무나도 쉬워 되려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은결을 저주하듯 불타올랐던 잔해는 눈에 파묻혀 그 원형조차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그 앞에서 은결은 짙은 불안을 느꼈다. 쉘터로 돌아가는 것이 정말 옳은가, 모종의 확인을 위해서라 한들… 그곳에 발 디뎠다 다시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지독한 상념이 은결을 속절없이 집어삼켰고. “……괜찮을 거야.” 그를 현실로 끌어올린 것은 이번에도, 고작 맞닿은 기척 하나였다.
추위에 차게 식었음에도 삶의 존재만은 분명히 알려 오던, 유일한 타인의 온기. 똑같은 공포와 불안 느끼고 있을 것임에도 그리 고해 오는 목소리는 명백한 힘을 지녔다. 나만 무서운 게 아니구나, 예희 님 같은 사람도 저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구나……. 그 사실만으로 은결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쉘터를 향해 딛는 걸음에 예희가 속도를 맞췄다. 대화는 오가지 않았으나 둘만의 세계에서 살아간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으므로 침묵은 평온하기만 했다.
내뱉는 숨결에 하이얀 입김이 서렸다. 과거와 같은 길이나 당연하게도 감상조차 과거와 같진 않았다. 은결의 삼촌을 비롯하여 그날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시체는 흔적조차 남지 못했으나 눈송이가 쌓인 길은 곧 시체로 장식된 것임을 두 사람 모두가 알았다. 백색의 도시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혔고, 그 위를 다시 새로운 사체가 덮었다. 여전한 침묵 사이 은결은 제 두려움을 곱씹었다. 쉘터에서 다시 탈출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배신자로 몰려 버리곤 말 거야. 일련의 불안은 쉘터가 과거와 같은 형태로 복구되어 있을 것이란 가능성을 전제로 한 망상이었다. 쉘터가 과거와 같은 행색 하고 있는 것과 보금자리의 역할조차 잃고 버려진 장소가 되어버린 것 중 어느 쪽이 더 절망적일까. 물음이 떠오르면 자조 어린 웃음이 흘렀다. 무엇도 끔찍할 뿐이라면 결국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는 것 아닌가. 결론은 명정했다.
일련의 이동이 끝맺어지기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쉘터는 적어도 겉으로 바라보기에는 파손 정도가 크지 않아 보였는데, 과거의 불길을 고려해 보았을 때 망가졌던 것을 누군가 수리했다고 보는 쪽이 더 알맞을 터였고. 그건 명백한 타인의 흔적이었다.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되어버리는, 걸까…….’ 덜어내고 덜어내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양면적인 감정이 치밀어 올랐으나 이곳까지 온 이상 도망은 허락되지 않아서. “……예희 님.” “그래.” 예희의 손이 얼어붙은 문고리를 잠깐 더듬는 듯했다가…… 이윽고 은결의 손과 겹쳐졌다. 손끝에 가닿은 쇠는 무척이나 시렸고, 그 감각을 곱씹을 새도 없이 문이 열렸다. 예희와 은결은 가만히 문 너머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리곤 침묵했다. 한참을. 어떠한 불가항력처럼.
쉘터의 기능이 망가져서 쉘터 안의 이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을 경우, 권력과 자원의 독점으로 과거보다 더한 폐단이 이어지고 있을 경우, 쉘터에 들어서는 순간 배신자로 몰려 버리는 경우 등……. 특유의 부정적인 성정 탓에 은결은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서 참으로 많은 상상을 해보았는데, 하늘에 맹세코 그조차도 이런 현실만은 그려본 적 없었다. 정확히는… 은결은 하나의 미래를 상상하고 싶지 않아 이 가능성만은 뇌리에서 지워버렸었다. 그것은 그가 생을 이어가기 위해 품은 소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가정이었으므로.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상상보다 잔인하다는 말 증명하듯. 어떤 결과가 그들을 기다린들 끔찍한 파문 쥐게 될 것임을 각오하고 있었는데도, 모든 공상을 깨트리고 내려앉은 가장 최악의 현실이 두 사람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번만은 맞닿은 온기조차 은결의 떨림 가라앉혀주진 못했다.
인기척 하나 없는 쉘터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수많은 죽음을 기리듯.
하늘이 없는 공간. 추위를 막아줄 벽이 굳건히 자리한 실내에서 흩날리는 눈꽃은 퍽 이질적이었다. 여전한 백색. 그것은 누군가의 사체이자 종말의 증표였다. 눈이 내렸고, 또 내려서…… 한 때에는 보금자리였던 쉘터에 한없이 냉기가 차올랐다. 그들을 기다리던 증명은 얼어붙은 세계를 향한 것뿐이었으며 남은 타인이란 여전히 강예희 하나뿐. 눈이 쏟아지는 하늘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쉘터의 바깥과 안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저 눈이 내렸고, 그뿐이었다.
끝을 향한 직감은 지나치리만큼 선명했어서, 지은결은 흩날리는 눈송이에 속절없이 온기를 빼앗겼다. 감염의 증상은 없었음에도 금방이라도 얼어 죽어버릴 것만 같이 추웠다. 육체가 아닌 마음의 설화雪化. 은결의 내면에서 끝없이 눈꽃이 쏟아졌다. 가족의 생을 잡아먹고 누군가의 내일을 빼앗아 꾸역꾸역 삶을 연명하고 있었음에도 그는 그저 무력했고, 온기가 부재한 세계엔 영원히 봄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애초 작금의 은결의 삶이 죽은 것과 무언가 다르긴 한가, 물음에 대한 답은 내어지지 않았다. “있잖아요, 예희 님.” 그리하여 그는…… 지은결은.
“우리도 죽을 거예요. 운명처럼.”
어떠한 종언을 받아들였다. 운명처럼.
쉘터의 이들은 전부 죽었다. 어딜 돌아보아도 인간의 기척은 부재한 채며 추위는 무게를 더해갈 뿐. 얼어붙은 세계는 곧 종말의 증명이며 그 앞에서 은결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공상은 증명되지 못했고 희망은 빛을 잃었다. 따라서 지은결은 절망했고, 세계의 멸망을 받아들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언젠가의 죽음을 무력히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다만 그런 은결조차 당장 생을 끝맺는 방식을 택할 수는 없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예희의 탓이었다. 예희는 은결 없이 이 세계에서 살아가지 못할 터였으니까…… 예희에겐 은결이 필요하니까. 그는 몰라도 강예희는 아직, 절망하지 않았으니까. 동정심일지 의무감일지 그 외의 어떤 것일지 모를 감정이 은결을 붙잡았고 얄팍한 생은 그렇게 이어졌다. 그러나 퇴로 부재한 반복은 그 자체로 누군가를 집어삼켜서…….
그래, 겨우 쥔 이어지던 생의 형태란 참 얄팍하기 짝이 없었다. 은결은 삶을 놓아 버리지 않았으나 희망을 잃었고 예희는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처음의 예희는 쉘터의 내부에서 종말의 단편 마주하고서도 그것이 세계의 흐름을 대표하진 못한다고 여겼다. 쉘터의 이들이 모두 죽었을지언정 바깥엔 생존자가 남아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다음의 강예희는… 텅 비어버린 도시에서 빛 하나 들어서지 않는 은결의 낯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더라?
누군가를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거창한 목표나 야망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의 행복, 한때의 웃음과 추억, 내일도 같은 일이 있을지 모른단 기대와… 희미한 가능성. 삶을 이루는 요인은 으레 하찮기 그지없었던 탓에, 절망의 전염을 앞둔 예희의 회상은 특별할 것 없던 일상을 그렸다.
‘그러고 보니, 세계…가 얼어붙, 기 시작한 거…… 크리스마스 직전, 이었…네요.’
‘그러게. 이번 선물론 무슨 가방을 받을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모든 게 얼어붙어선.’
그건 먼 과거의 찬란함도 멸망 이전의 세계도 아닌 고작 한 달가량 전의 하루였다. 5년 전의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성대하게 꾸며졌던 예희네 집안 소유 백화점에서, 고작 선물을 주제로 도란도란 나눈 얘기는 지금이라도 바란다면 얼마든지 재현할 수 있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각별함도 애틋함도 부재한 회고. 그런데도 그날의 이야기가 유독 선연하게 기억에 남은 건. 멸망이 휩쓴 5년간 바래고 낡았음에도 여전히 군데군데 불이 켜진 채던 트리의 형상이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예희 님, 은……. 이번 크리스마스…에. 받고 싶, 은 선물… 같은 게, 있으신…가요?’
‘그걸 골라야 해? 매번 알아서 챙겨줬어서 모르겠는데…….’
‘그런, 가요…….’
‘그럼 넌. 받고 싶은 선물 같은 걸 매번 직접 고르고 살았어?’
‘아뇨. 저도… 골라, 본… 적은 없어요. 크리스마스가 되어, 야…… 그날이 크리스, 마스란 사실…을, 알아, 채곤 했으니까…….’
혹은, 멸망 이후의 여섯 번째 크리스마스가 코앞이었단 이유 탓이었을지도.
당시의 예희는 태양열 에너지 따윌 고집했던 과거의 제 할아버지에게 감사해야겠단 낭만 없는 상념을 품었었다. 일부나마 반짝이는 전등이 은결에게 자그마한 위안을 안겨준 것 같단 사실이 마음에 들었고, 유령 도시에 남은 과거의 흔적이 하루나마 평온한 밤을 안겨주어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지금의 강예희는 그 풍경에서 분명한 끝을 읽어냈다. 그런 꿈을 꿨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 이상으로 겨울날의 일상이 지닌 의미는 없었고 그날 이후 은결은 미래를 입에 담지 못했다. 한때의 대화를 재현할지언정 지은결이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이상 어절에 담긴 의미는 결코 과거와 같을 수 없었다.
예희의 마지막 발악은 은결을 끌곤 아이비 그룹의 백화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은결은 예희의 바람에 수긍하여 그의 뒤를 따랐으나 그 이상의 행위가 이어지진 않았다. 같은 모양의 트리를 앞두고 은결은 검디검은 눈을 깜빡였고 죽어버린 눈동자는 더는 불빛에 위안받지 못했다. 예희는 고작 한 달 전에 비해 꺼진 전구가 늘었단 사실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이 트리가 반짝일 수 있는 기한은 얼마나 남았을까……. 그것은 꼭 무의한 그들의 생을 닮아 있었다.
누구의 흔적도 찾지 못한 매일이 반복되며 더는 품을 수 있는 희망조차 없는데도 스러지는 것은 늘어만 가서. 체념을 양껏 품은 검은 그림자가 예희의 발목을 끈질기게 잡아당겼고, 강예희는 그 순간 처음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은결의 말은 틀린 것 하나 없었을지 모르겠다고. 이러한 현실에 어떠한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그래야만 한다면.
그건 종말이란 단어가 걸맞지 않겠냐고.
절망은 쓰나미처럼 다음의 것을 휩쓸었다. 누군가가 꿈을 빌었던 크리스마스의 별 장식 앞에서 예희는 미래를 소원하길 포기했고, 은결은 그런 예희를 붙잡지도 물 위로 끌어 올리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새하얀 눈에 파묻혀버린 사람이었고…… 사위를 뒤덮은 눈결이 한 사람의 존재 더 집어삼켰다 한들 이는 특별한 일조차 되지 못했다. 그것뿐인 이야기.
그날 밤, 벌어져 버린 마음의 틈으로 차디찬 냉기가 스며들었다. 콜록, 강예희가 기침을 토해냈으며. 분명한 전조 외면하기엔 텅 빈 백화점은 너무나도 고요했다.
열이 오르고 목이 아팠다. 실내에서 두터운 옷을 몇 겹이나 껴입고 있었음에도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은결과 예희는 모두 그것이 감염의 증세라 믿었다. 얼어붙은 세계에서 추위에 감염된 이는 눈이 되어 흩날린단 절대적인 명제 변할 일은 없어서, 거대한 두려움이 예희를 집어삼켰다. “추워…….” 흉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갈구하는 대상은 일종의 불가능성이었다. 아프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문장의 이면에 담긴 뜻 읽어내긴 어렵지 않은 일이었고 은결은 그것이 지나치게 덧없다고 여겼다.
절망의 근본적인 이유는 희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은결은 진심으로 예희가 안타까웠다. 진실에서 눈 돌리길 그만두면 이것이 그들이 마땅히 맞이해야 할 운명이란 사실 또한 알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분명… 괴롭지 않을 텐데. 친애의 탈을 뒤집어쓴 연민의 감정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강예희는 동정을 바라지 않는단 당연한 사실 곱씹다가도, 은결이 굳이 입을 연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많, 이…… 아프세요?”
“……보면 몰라?”
“불쌍하네요… 예희 님, …자신, 에게선… 도망칠 수, 도 없는데…….”
심연을 닮은 흑색 시선이 거울처럼 예희를 비췄다. 우습게도. 그 모든 일을 겪고서도 상대의 낯엔 파문 하나 떠올라 있지 않았다. 당연하기 짝이 없는 현실을 고할 뿐이라는 듯 어조는 그저 덤덤했으나, 예희가 은결의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을 인지하니, 한마디의 말은 그가 죽음에서 도망칠 수 없을 것이란 절대적인 선고로 변모했다. 희망의 부정이 아닌 절망의 심화가 예희를 뒤흔들었다. 다음의 행위는 두뇌를 거치지 않고 이어졌다.
“네가 뭘 알아! 나한테… 콜록, 그런 말, 하지 말란 말야!”
은결의 뺨을 때리는 손길은 지나치게 유약했고 기침 사이 묻어나는 것은 분노가 아닌 절대적인 공포. 쉬어버린 목소리는 외침조차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 무언가를 표출한다 한들 변할 것은 없었다. 제 멱을 붙잡아 오는 손길에 저항 없이 몸을 맡기며, 은결은 저것이 어린아이의 투정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지독한 체념의 결과였다.
예희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은결에게 감정을 쏟아냈고, 지은결은 답하지 않았다. 침묵으로 예희의 곁을 지킬 뿐.
다음 날, 예희는 이마에 가닿아 오는 찬 감촉에 눈을 떴다. 몸은 어제보다도 더 뜨거웠고 비정상적인 추위는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불덩이 같은 체온에도 추위가 가시지 않는 것은 감염 탓인지,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한기 때문일지…….
아픈 것은 싫었고 죽는 것은 더 싫었다. 하지만 예희는 현실에서 도망칠 방법을 무엇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은결의 선고엔 기만 한 점 뒤섞이지 않았고 예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눈이 되어 흩어져버리기까지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처음의 생각, ‘내가, 언제부터 죽음을 당연히 그리게 되었더라.’ 다음의 자각. 아랫입술을 짓씹던 예희는 시선만을 겨우 돌려 은결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은결은 고요히 예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얼핏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지은결조차 예희의 삶을 기대하지 않았다. 바라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예희는 하릴없는 외로움에 잠겨들었다. 아득한 세계에 오직 둘만이 표류 중이란 자각이 속절없이 밀려들었다. 종내 예희가 지녔던 마지막 갈망 한 자락은 완전히 흩어져 스러졌다. 무엇도 그들을 구원해줄 수 없었으므로, 예정된 끝을 앞두고 살아가고 싶단 욕망 품는 행위가 얼마나 무의한질 깨달은 탓이었다.
이제서 마음을 다잡고 희망을 품기엔 두 사람 모두가 기억하는 문장이 있었다. “우리도 죽을 거예요, 운명처럼.” 예언이 현실이 되어버리는 순간은 특별한 전환점을 요구하지 않았다. 죽음은 일상이며 종말은 당위, 이곳이 은결과 예희가 살아가는 장소였다. 운명. 은결이 입버릇처럼 내곤 했던 단어를 몇 번이고 입안에서 굴려 보았다. 필연성을 지닌 끝 앞에서 강예희가 할 수 있는 발악은 이제 몇 남지 않았다. 일말의 충동이 스며들듯 예희의 내면을 적셨다. 죽음은 여전히 끔찍하게 두려웠지만…… 그는 이제 희망이란 감정을 모조리 잃었으므로. 예희에게 허락된 열망은 하나뿐이었다.
“오늘, 이… 며칠이었더라?”
“12월… 23일, 일 거예요.”
“크리스마스가 곧이네.”
“네, 그렇…네요. 운이 좋, 다면……. 이번 크리스마스는… 트리 앞, 에서…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예전엔 너도, 나도……. 받고 싶은 선물 같은 건 없다고 했었는데.”
은결을 향해 발길질하고 악을 썼던 시간을 두 사람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음에도, 암묵적인 묵인 하 아무런 일도 없었단 것마냥 평이한 대화가 오갔다. 세찬 기침이 몇 번이고 울리며 목덜미를 막아선 탓에 다음의 문장이 내어지기까진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쩍쩍 갈라진 목소리는 그 강예희의 것이라기엔 매우 거칠었고 힘이 없었다.
“그런데 나, 이제 받고 싶은 선물이 생겼어.”
“……선물, 이라면?”
“어차피 죽어야만 하는 거라면……. 네가, 콜록, 날.”
예감은 선명했음에도 은결은 예희의 목소릴 가로막지 않았고 예희는 은결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은결의 낯 마주할 자신이 없는 사람처럼. 그럼에도 제 고집 내세워 버리고는 마는 어린아이처럼.
대비할 새도 없이 다음의 어절이 이어졌다.
“죽여 주면 안 될까?”
수 초의 공백. 은결의 마음이 일렁였다. 떨리는 목소리가 품은 뜻이란 망자의 유언인가, 생자의 욕망인가……. 무심코 그런 의문이 치밀었으나, 결론이 어떠하든 변할 것은 없었으므로 은결은 속절없이 침잠하는 내면의 목소리에서 눈을 돌렸다. 죽음은 이미 세계를 휩쓴 후였다. 두 사람의 죽음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고, 그게 고작 며칠 빨라진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었으며, 그러니까.
은결은 그의 부탁을 거절해야 할 이유를 무엇도 찾을 수가 없어서.
“네, 예희 님.”
명백한 긍정에 예희가 눈을 내리감았다. 새로운 눈발을 기다리듯, 안식을 고대하듯. 은결은 그 낯을 한참을 바라보았고 예희는 은결을 재촉하지 않았다. 인간의 생은 너무나도 쉽게 스러지면서도 끊어내기는 지독하게 어려운 것이라서, 과거의 어느 순간과 같은 아득함이 은결을 뒤흔들었다. 망설임은 짧았고 이윽고 은결은 발을 떼었다. 예희와 은결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차게 식은 손끝이 예희의 목덜미에 가닿았다. 두근, 선명한 맥이 느껴졌고. 열이 오른 예희의 살갗은 뜨거웠다. 생자만이 지닐 수 있는 열기였다.
그들이 그리도 찾아 헤매었던 생을 향한 증명은 고작 이곳에 있었구나……. 끝을 앞두고서야 체감 쥔 현실이란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은결은 그대로, 손에 힘을 주어 예희의 몸을 찍어눌렀다. 그에 비해 한 뼘 이상 작은 몸이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기도가 막히자 생리적인 반응으로 막힌 숨이 터져 나왔고, 예희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5년의 표류에 거칠어진 손끝이 은결의 옷자락 위를 몇 번이고 긁어냈다. 은결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대신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부족한 산소 탓인지 시린 추위 탓인지 파리하게 질린 입술이 ‘지은, 결…….’ 입 모양으로나마 그의 이름을 불렀고, “……네.” 은결은…… 그 순간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고작 몇 분밖에는 안 될 시간은 영겁만큼 길었고 찰나처럼 짧았다. 예희의 반항은 거셌고 그것은 얼핏 뱉은 간청을 후회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은결은 멈추지 않았다. 그 강예희가 요구한 죽음이 어떠한 뜻인질 가장 잘 알던 이는 지은결 본인이었고, 설령 예희가 진실된 후회를 품었다 해도 그들에게 남은 미래는 고통 끝에 도래할 죽음뿐이었으므로. 멈출 이유가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외면했다. 폐에 들어찬 것 없는 상대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은결의 힘은 예희의 기도를 틀어막기엔 충분했으나 상대의 경추를 단번에 부러트리기엔 부족했어서, 예희는 한참을 고통에 몸부림쳤다. 은결의 손등에 새겨진 붉은 자국에 핏물이 맺혔다. 고통은 부재한 채였다. 예희의 발악이 잦아들기 시작했을 때, 은결은 문득 예희가 제게 무얼 고하려던 건지가 궁금해졌다. 평생토록 답 구할 수 없을 의문이었다.
강예희는 곧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은결은 거칠어진 숨을 내쉬었다. 그가 현실감을 되찾기까진 다소 긴 시간이 필요했다. 손끝에서 꺼져가던 맥의 감각보다도 끔찍했던 것은 더는 눈 뜨지 않는 예희의 시체이며 이제 이 세계에 남은 건 지은결 하나뿐이란 자각이었다. 은결의 생을 이어가던 마지막 끈이 끊겼다. 은결은 공허감을 느꼈다. 봄의 부재 자각한 날 이래 그는 언제나 추위에 떨었으나 지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은결은 몸을 웅크렸다. 동시에, 은결의 등허리를 타고 기어오르는 짙은 위화감이 있었다. 떨궈진 직후 홱 들어 올려진 고개는 곧바로 발치의 주검을 찾았다. 예희는 그곳에 있었다.
혹한에 좀먹힌 죽음이 더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눈은 내리지 않았다.
하얀 피부에 푸르딩딩하게 새겨진 은결의 손자국이 선명했다. 시간이 지나고 시체가 딱딱히 굳어감에도 그것은 희게 화하지 않았다. 은결은 죽음 내려앉았음에도 눈이 흩날리지 않는 작금의 풍경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팔을 뻗어 예희의 시체를 끌어안았다. 숨 멎은 이는 말이 없고 어루만진 살갗은 더는 열기 품지 않았으므로 죽음은 부정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홀로 이 세계에 고립된 은결은, 그제야. 필연적으로 잔혹한 진실을 깨달았다. “왜.”
그들이 감염이라 믿었던 것은 구시대의 질병에 불과했다. 예희는 추위에 감염되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감염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은 은결이 지금껏 찾아 헤매다 끝내 포기한 삶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불씨는 꺼졌다. 은결의 절망에 의하여. 예희는 삶을 갈망하지 못했다. 은결이 그리 믿도록 만들었으니까.
등불의 점화가 아닌 종말의 확인. 그토록 갈망했던 희망을 찢어발긴 것은 지은결 본인이었다.
“왜…….”
달콤한 절망이 속절없이 은결을 휘감았다. 깨져나간 죄악의 파편이 쉼 없이 은결을 난도질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맞이하는 감정의 파도였다. 예희의 시체를 안은 손에 힘을 더했다. 가파른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렸으나 그조차 한 사람의 것뿐이라, 지은결은.
끌어안은 시체에 몸을 파묻었다. 여전히… 여전히, 여전히! 무엇도 변치 않았고 변할 수 없었다. 불씨를 잊지 말라 고했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는 제 생을 제물로 바쳐 가며 은결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일러 주었으나 은결은 유지를 놓아 버렸고, 그러므로 모든 비극은 은결이 자초한 것이었다. 과거가 오롯이 후회스러웠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속죄의 수단은 부재하였고 은결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에겐 죽음의 자격이 없었으나 그 말고 택할 수 있는 선택지조차 없었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이 지은결을 비췄다. “잘못… 했어요.” 누구를 향한 것이든, 사죄받아야 할 대상은 눈 감은 후이며 은결은 그러한 현실에 설움 품는 저가 비참하리만큼 증오스러웠다. “전부, 저 때문…이에요.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흐느낌 닮은 목소리가 몇 번이고 반복되나 눈물은 흐르지 못했다.
당위에 기반한 자학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폐허에 잠식된 정신 사이로 은결이 하나의 이질성을 인지하기까진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찬 감각이 그의 볼에 와닿았고…… 자각까지 걸린 시간과 대비되게도 그것의 근원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예희를 붙잡았던 손이 존재의 궤적 잃곤 사라졌다. 검은 빛이 일렁였다. 은결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백색의 세계에서 검은 눈송이가 흩날렸다. 어떠한 종말 표방하듯.
신체의 말단이 눈송이로 화하는데도 추위는 변함없이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은결은 추위에 감염된 것이 강예희가 아닌 저였음을 어렵잖게 알아챘다. “우리도 죽을 거예요. 운명처럼.” 끝도 이어짐도 고대할 수 없던 이에게 선고를 내리듯… 죽음은 운명처럼 지은결을 덮쳐들었다. 은결은 무력하게 그것에 수몰되었다. 지독한 냉기가 사지의 감각을 전부 앗아갔기 때문일지 기이하게도 고통은 없었다. 세계의 끝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종말, 그 한 단어만이 은결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희망이 죽은 세계. 영원히 표류할 것만 같던 난파자에게도 끝은 도래했고, 검게 피어난 눈꽃은 지나치리만큼 아름다웠다…….
지지대를 잃은 은결의 몸이 예희의 위로 기울어졌고, 이윽고 그조차도 완전히 사라졌다. 검은 눈송이가 예희의 사체 위로 내려앉으니…… 그것이 끝이었다. 흩날리는 눈발은 누군가의 생이었던 것이나 이제 그곳엔 일말의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영원한 고요 속에서 크리스마스 트리의 전구가 반짝였다.
머묾 허락받은 것은 시체 한 구가 전부. 12월 23일. 크리스마스를 고작 이틀 남기고, 세계의 생명이 전부 얼어붙었다.
완연한 멸망이 내려앉았다.